제주 사람들은 매년 2월이면 ‘그분’을 기다린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과 파도, 해류와 안개로 오신다는 분.바다를 지배하는 여신이자, 해녀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수호신.
그녀의 이름은 영등할망이다.
제주 무속신앙의 핵심 중 하나인 해신 영등할망은 오늘날에도 제주의 동쪽 바닷마을을 중심으로 굿과 제의 속에 살아 숨 쉰다.
이 글에서는 영등할망을 중심으로 한 바닷마을들—하도리, 세화, 표선—의 신화와 신앙,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을 따라가 본다.
1. 신의 바람이 제주를 덮을 때 – 영등할망의 전설
영등할망은 바다에서 오는 신이다.
설화에 따르면, 매년 음력 2월 초가 되면 영등할망이 바람을 타고 제주를 방문해
머무는 15일 동안 해산물의 복, 날씨, 해녀들의 물질 운을 결정하고 떠난다고 한다.
그녀가 도착하는 날은 ‘영등 드는 날’, 떠나는 날은 ‘영등 나가는 날’로 불린다.
이 기간 동안 해녀들은 물질(잠수작업)을 쉬고, 당(신당) 앞에 음식을 올려 제사를 지내며 그녀를 맞이한다.
영등할망은 단순한 신이 아니다.
그녀는 바다를 직접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지며, 그 해의 어획량, 기후, 안전 모두가 그녀의 기분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만약 마을에서 제를 소홀히 하거나, 굿을 거르기라도 하면 거센 파도, 해일, 익사 사고가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영등기간 동안 제주 해녀 공동체는 물질을 전면 중단하며, 마을 전체가 조용하고 신성한 분위기 속에서 굿과 기도를 올리는 기간으로 보낸다. 이 전통은 지금도 몇몇 바닷가 마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2. 하도리와 세화 – 영등굿이 살아 있는 동쪽 바닷마을
제주시 구좌읍의 하도리와 세화리는 제주 영등신앙의 대표적인 중심지다.
이곳은 영등할망을 위한 제주 동부 최대의 영등굿이 열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도리 영등당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며, 영등이 도착하는 날이면 제사상에는 물고기, 해조류, 감주, 돼지고기, 떡 등
바다의 신을 위한 제물이 정성껏 차려진다.
이때 마을 심방이 굿을 집전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은 각자의 소망을 담아 기도한다.
세화리 역시 영등할망 전설이 깊게 깃든 곳이다.
이곳은 해녀 수가 많았던 마을로, 지금도 영등기간에 세화해변에서 간단한 제의가 치러지며,
영등할망을 위한 작은 돌무더기나 나무제단이 해변 가까이 조성되어 있다.
하도와 세화는 단순한 어촌이 아니다.
영등할망의 신성이 깃든 마을이며, 매년 그 신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공포, 기대와 기도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문화공간이다.
3. 표선의 바다제 – 해신신앙과 공동체의 유산
표선면은 제주 남동부 해안에 위치한 마을로,
영등굿뿐 아니라 바다를 위한 제의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 해신신앙이 남아 있는 곳이다.
표선포구와 해수욕장 인근에는 용왕당, 당산나무, 해녀당 등이 존재하며, 2월이면 영등할망뿐 아니라 용왕신, 해신, 수호신 등에게 드리는 다양한 해신제와 풍어제가 열린다.특히 표선에서는 여성 중심의 해녀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굿과 제례를 이끄는 경우가 많다. 표선 영등굿의 특징은 굿이 단순한 신앙을 넘어 관광자원화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지자체 주관 문화행사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어, 전통적인 의미는 약해졌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 해신신앙의 존재와 그 정신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표선은 해녀박물관, 신산공원 등과 가까워 신화적 공간과 생활문화 유산이 함께 살아 있는 동선으로도 추천할 수 있다.
결론: 바다는 여전히 신의 공간이다
제주의 바다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그곳은 신이 오가는 길목이고, 사람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신에게 배우는 공간이다.
오늘 소개한
- 하도리 영등당,
- 세화해변,
- 표선 해녀당 및 바다제 외에도
전통 굿터가 남아 있는 온평리,
해녀들의 신앙이 남아 있는 김녕리,
다양한 해신 이야기가 전해지는 신창리 등도 함께 찾아가 볼 만하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굿이지만,영등할망을 기다리는 마음만은 제주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바람처럼 살아 있다.